원색적인 복음을 찾아서 – ‘예수 믿고 천당!

회전식 연발권총에 하나의 총알만 장전하고 머리에 총을 겨누어 방아쇠를 당기는 목숨을 건 게임인, 러시안 룰렛(Russian Roulette)처럼 무모한 도박이 또 있을까? 어찌보면 우리의 삶 자체가 도박이랄 수도 있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목숨을 걸고 하는 도박 게임은 정말 끔찍하다. 그런데 사람들은 머리에 총구를 갖다대고 방아쇠를 당기기 전 그 짜릿한 전율과 스릴을 맛보기 위해 이 노릇을 즐긴다(?). 이 순간은 그야말로 생과 사가 나뉘어지는 생사의 갈림길이다. 결국 둘 중 하나이다.

“왜 예수를 믿나?”라는 질문은 내 신앙여정에서 항상 새로운 마음과 자세로 자신 스스로에게 던지는 화두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이고, 예수를 믿으면 뭐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예수를 믿는 것이 내게 무슨 유익을 가져다 주는 것인지, 예수를 믿어 어쩌겠다는 것인지… 믿음의 확신은 수많은 자문자답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게 하는 순례자의 여정에서 형성된다.

예수가 진리이듯이, 예수를 믿는 믿음 역시 하나의 분명한 객관적 진리가 있다. 예수 믿는 궁극적 목적과 이유이다. 예수를 믿는 형식과 방법에 대해서는 자기 나름의 스타일이 있으니 잘못된 방식이 아니라면 함부로 왈가불가 할 것이 아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최종적 목표는 서로가 다를 수가 없다. 궁극적인 한 점(omega point)에서 만나야 한다.

그것이 천국이다. 죽음이 없고 고통이나 슬픔이 없는 ‘영원한 기쁨'(eternal joy)만 있는 영생의 나라이다. 너무 뻔한 이야기라서 유치하게 들리는가? 그렇다면 유치하지 않은 어떤 고매하고 고상한 믿음은 무엇이고 어찌 표현해야 하는가? 예수 믿는 궁극적 목적이 천당가는 것 말고 또 있는가? 괜히 너무 세련되고 유식하게 믿으려다보니 십자가의 예수 머리 위 피묻은 가시관을 내버리고 번쩍이는 황금빛 왕관으로 대신하려는 우를 범하지는 않는가?

한때 지하철 역에서 많은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던 그 ‘혐오스러운 전도자들’은 요즘 보기가 힘들다. 그러다보니 저들의 행위는 본받지 말아야 하지만 저들의 말은 들어야 하는데, 목욕물을 버린다 하면서 통안의 아기마저 버린 결과가 되었다.

종말론은 우리 신앙에 아주 중요한 교리임에도 불구하고 한때 난리법석을 떨었던 잘못된 교리의 시한부종말론자들로 인해 종말론 자체가 거부감을 당해 희석된 결과와 같다. 그들의 전도 방식이 마음에 안 들기도 하지만, 현대인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으로 경계선이 분명한 것을 싫어해 단색적이고 원색적인 복음을 거부하는 회색지대의 신앙 안에서 안주하기를 원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우리는 귀를 막고 진리를 거부하며 가려운 귀를 긁어줄 스승을 찾는다. 그리고 어쩌다 만나게 된 선지자들에게는 제발 듣기 좋은 메시지만 전하라고 말한다. 그래서 저들에겐 천국은 있을지 모르나 지옥은 없다.

예수의 탄생을 기점으로 역사를 BC/AD로 나누듯이 죽음을 기점으로 우리는 산 자와 죽은 자로 나누어진다. 여기에 삶이 있는 것처럼 사후세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것인가로 또 생각은 갈라진다. 그리고 어치피 50% 반반의 선택으로 사후세계를 인정할 경우 또 한 번의 선택과 결정이 뒤따른다. 사후세계는 어떤 곳인가? 이 질문에 두 개의 답이 있을 뿐인데, 그것은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이고, 이 둘 중의 하나에 우리는 속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국이 있다고 믿으면서 상대적인 지옥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내가 예수 믿고 그 약속의 말씀에 따라 믿음으로 살겠다는 것은 지옥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천국을 사모하기 때문이다. 복음은 천국의 영생을 말하고 있으며, 천국갈 사람은 천국에 대한 소망으로 이 세상을 살아간다. 그러나 지옥에 갈 사람들은 스스로 지옥을 들먹이며 관념화시켜버린다. 천국에 갈 자신도 없고, 천국의 삶을 흠모하지도 않고 그러면서도 지옥은 가기 싫은 자가당착의 모순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탁월한 변증가 C.S.Lewis는 책 <Beyond the shadowlands 천국과 지옥>에서 “천국은 현실도피자의 생각이야” “지옥은 단지 심리 상태일 뿐이야” “선한 하나님은 아무도 지옥에 보내지 않을 거야” 등등의 일반인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천국과 지옥의 신화들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한다.

“여러분은 천국 이외에는 어떤 다른 운명도 생각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한 사람을 만난 적이 있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세상의 고통 가운데서도 천국의 특징인 많은 기쁨을 누리고 있다. 또한 여러분은 선(善)을 증오하는 사람들을 만난 적이 있을 것이다. 이들은 악이 그들을 뒤틀어 놓고 비참하게 만들지라도 악한 친구들을 더 좋아하고 악한 행동을 한다.”

오늘의 기독교가 세상에서 힘을 잃은 것은 세상에서의 고난과 핍박 때문이 아니라, 결코 세상이 가질 수 없는 확실한 천국의 소망을 강한 믿음으로 소유하며 증거하지 못 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땅에 있으면서도 하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사시며 아버지가 계신 하늘나라가 자신이 궁극적으로 돌아갈 자신이 속해 있는 나라임을 강조하셨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철저히 이 땅 위 주어진 십자가의 삶에 모든 것을 바쳤으며 “다 이루었다!”는 말씀으로 자신의 사명을 마치셨다.

다시 원색적인 질문을 자신 스스로에게 던져본다. “왜 예수 믿는가?” -예수 믿고 천당가겠다는 것 아닌가? 그 외의 대답은 부차적인 것일 뿐이다.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건 예수 안 믿어도 가능하고 아니 안 믿는 사람들이 더 잘 사니까 이유가 안 되고, 마음의 평정과 평안을 찾는다면 솔직히 죄를 말하고 회개를 외치는 교회보다는 산 속의 절간을 찾는 게 더 낫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자꾸 다른 소리를 하는가? 천국 가기 싫은가? 천국은 죽음처럼 현실이고 실제다.

부활이 없다면, 부활하여 천국에서의 영생의 소망이 없다면 바울의 고백처럼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고전 15:19)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거짓 복음에 속지 말라. 성경의 진리가 아닌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고후 11:4)을 용납하지 말라. 진리는 단순하여 우리를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 아버지의 집을 향한 탕자의 귀향길에 오르도록 인도하기 때문이다. 진리는 우리를 자유케 한다.

조규남 칼럼위원